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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

last modified: 2016-03-24 23:26:34 Contributors


"나는 나 자신이 천재라는 걸 알았다"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다"
"공을 가지면 내가 주역이다. 결정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나다."

이름 요한 크루이프(Johan Cruijff)
생몰년도 1947년 4월 25일 ~ 2016년 3월 24일
국적 네덜란드
출신지 암스테르담
포지션 FW
선수 AFC 아약스 (1964/65 - 1972/73)
FC 바르셀로나 (1973/74 - 1977/78)
스앤젤레스 아즈텍스 (1979-80)
싱턴 디플로메(1980-81)
레반테 UD (1981)
AFC 아약스 (1981/82 - 1982/83)
페예노르트 (1983/84)
지도자 AFC 아약스 (1985/86 - 1987/88)
FC 바르셀로나 (1988/87 - 1995/96)
카탈루냐 국가대표팀 (2009 - 2013)
기술고문 AFC 아약스 (2011 - )
국가대표 48경기 33골

Contents

1. 토탈 풋볼
2. 선수로서의 크루이프
3. 월드컵 잔혹사
4. 바르셀로나
5. 크루이프 감독
6. 평가
7. 잡동사니
8. 기록
8.1. 선수 기록
8.2. 감독 기록
8.3. 수상 실적

1971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드로 마촐라
3위
조지 베스트
1973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노 초프
3위
게르트 뮐러
1974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지미에시 데이나
1975 Ballond'or
수상
레흐 블로힌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요한 크루이프

AFC 아약스 영구결번
No.14

천재

축구화를 신은 피타고라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세계 축구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토털 풋볼의 지휘자

혁명가

Hendrik Johannes Cruijff(헨드릭 요하너스 크라위프).

1947년 4월 25일 네덜란드 출생.

토탈 풋볼(토탈 사커)의 아이콘 네덜란드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그리고 네덜란드 콩라인 전설의 시작, 꾸레 대통령 등번호 9, 14[1] 아약스에서 14번은 영구결번이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야전사령관으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토탈 풋볼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준우승을 일궈내면서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각광받았다.

단순히 세계적인 스타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레전드 오브 레전드. 펠레마라도나에 비하면 살짝 일반인들에게 네임 밸류가 떨어지긴 하지만, 갓 축구에 입문한 풋사과 축덕부터 전문가들까지 한결같이 크루이프가 펠레마라도나에 버금가는 선수라는 데 동의한다. 그가 펠레와 마라도나에 비해 부족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가 없다는 점이다.

흔히 축구의 레전드를 딱 세 명만 뽑아보라고 한다면 대부분 펠레, 마라도나 그리고 크루이프를 뽑는다. 펠마에 버금간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는 얘기.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보통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를 투표하면 1, 2위를 펠레와 마라도나가 나눠먹고 3, 4위에 크루이프와 그 라이벌인 베켄바우어가 뽑힌다. 5위부터는 디 스테파뇨가 뽑히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이제 메시와 호날두가 뽑히겠지.

디 스테파뇨가 근대 축구의 시조로서 챔피언스 리그의 토대를 쌓았고, 펠레는 브라질을 이끌고 10년간 세계를 장악했고, 베켄바워가 리베로 포지션을 창시하며 수비수의 개념을 바꾸면서 유로와 월드컵을 차지하고, 마라도나가 혼자서 월드컵을 지배했다면 크루이프는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바꿔버린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축구계의 혁명가

'Flying Dutchman'이 그의 별명. 여담으로 'Non Flying Dutchman'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데니스 베르캄프의 별명이다. 이 'Flying Dutchman'이 마크 오베르마스에게 붙은 별명이 아니냐는 의견이 넷상에서 일부 떠도나 이것은 한 사람만의 고유별명은 아니며[2], 네덜란드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에게 찬사의 의미로 붙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판 바스턴이나 아르연 로번. 비단 축구종목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어서, 메이저리그 전설의 유격수이자 명예의 전당 'First Five'중 한 사람인 호너스 와그너의 별명이기도 했다.

1. 토탈 풋볼


사실 토탈 풋볼이라는 풍조를 요한 크루이프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토탈 축구의 원형을 제시한 스승은 아이러니하게도 뻥글랜드 잉글랜드 감독들이었다. 잭 레이놀즈(Jack Reynolds) 감독은 공격축구의 신봉자로 떼공격, 떼수비를 시도했으며, 빅 버킹검(Vic Buckingham) 감독은 점유 축구의 신봉자로 패스&무브를 강조했다. 이렇게 기본 토대가 이미 깔린 상태에서 선수시절에 이러한 감독들의 플레이를 지켜본 리누스 미헬스(Rinus Michels)가 아약스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토탈 풋볼를 완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크루이프는 토털 풋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천재였다. 리누스가 토탈 풋볼 전술가라면 크루이프는 야전사령관이었던 셈.

한편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대를 이어 토탈 풋볼의 싹을 키워나갈 무렵, 잉글랜드는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뻥축구 킥 앤 러쉬 전술이 대세를 이루게 되는데...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하지만 토탈 풋볼이 완전히 네덜란드 고유한 흐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미헬스 감독의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탈 풋볼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 1950년대 헝가리는 경기 중에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으로 황금색 바람을 일으켰고,[3]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탈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으며,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테나치오를 개량해 스위퍼를 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팀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털사커를 완성시킨 리누스 미헬스나 요한 크루이프의 위대함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저런 개념을 완성해 낸 리누스 미헬스나 전혀 새로운 개념에 완벽히 적응한 크루이프나 위대한 사제지간이다. 이 두 사람과 당시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으로부터 현대축구가 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선수로서의 크루이프


크루이프는 피지컬, 운동능력, 테크닉, 브레인이 모두 갖춰진 완벽한 선수였다. 떡대도 떡대인데다 빠른 순발력과 주력, 당대 독보적인 탑티어 테크닉. 거기에 그 누구보다도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다. 온더볼, 오프더볼 상황에서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력이 역대 최고인 선수. 월드컵 비우승자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펠레, 마라도나와 동급 레벨로 취급받는게 아니다. 황제 베켄바워조차도 선수로서 역량은 자신이 크루이프에게 안된다는걸 언급했다.

요즘 뛰어난 드리블러라면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는 발뒷꿈치를 이용한 기술, 슛이나 패스를 할 듯 하다가 발뒷꿈치로 공을 멈추고 수비수가 수비동작에 들어가 몸을 빨리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재빨리 치고가는 기술은 루이프 턴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크루이프가 처음 개발한 개인기다. 거기에 크루이프는 남들이 갖추지 못한 엄청난 축구 두뇌가 합쳐졌기 때문에 레전드가 될 수 있었다. 요즘도 간혹 보이는 페널티 킥 상황에서 패스도 크루이프가 최초다.[4]

<영상> 1974년 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보인 크루이프 턴.

그러나 엄청난 게으름뱅이에다 애연가였다.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고 연습도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선수시절 경기에 뛸 때도 하프타임만 되면 담배를 피워댔다고...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게으른 천재끝판왕이었다.

어느 네덜란드 감독은, 인생의 불공평성을 언급할 때 크루이프를 예로 들며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지, 몸관리도 대충하지, 담배는 뻑뻑 피어대는 놈인데도 타고 난 재능 하나만으로 세계최고다."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요한 크루이프FC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고 난 후 제자였던 미카엘 라우드럽에게 "너님은 항상 80~90%의 노력밖에 안 함. 니가 빈민가에 태어나서 오직 축구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절실함에 재능을 100% 발휘한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임! 예끼! 니미!"라고 갈궜다. 니들은 나보다 재능이 없으니까 노력해야지?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 그리고 라우드럽은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안하고 논다고" 욕을 먹던 라우드럽은 스완지 시티의 감독이 되어서 "몸과 마음을 다바쳐서 축구에 헌신하라!"고 선수들을 갈구는 중이다. 아이러니하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그리고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게으른 천재같은 선수를 만나는데, 그 선수가 호마리우. 한 번은 휴가를 보내달라고 조르자 빡쳐서 "다음 경기에서 3골 넣으면 보내줄게!"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휴가를 즐기러 (...) 근데 그 해트트릭을 넣은 팀이 하필이면 레알 마드리드... 다시 말해 엘 클라시코...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여담으로, 리누스 감독이 토탈 풋볼을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감독이나 선수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특히 선수들은 빡센 체력 훈련에 죽어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유독 크루이프는 '토탈 사커는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이며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그런데 이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토탈사커는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체력을 아끼고 압박 시간을 줄이는 그런 형태의 축구다. 그리고 측면, 중앙 등에서 공을 돌리다 보면 자연적으로 상대의 압박이 거세져서 볼을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을 극복해 내는것이 바로 탈압박이다. 탈압박의 전제가 되는것이 볼을 다루는 기술 즉, 테크닉 인것이다.

3. 월드컵 잔혹사


1974년 월드컵 결승전은 네덜란드와 서독의 시합이었는데,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는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토털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안착했다. 처음엔 네덜란드를 듣보잡무시했던 사람들도 토탈 풋볼을 보고는 네덜란드의 승리를 예측했다. 하지만 결국 네덜란드는 패배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네덜란드는 월드컵과 지독한 악연을 맺고 있다(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스폰서이던 아디다스가 독일 기업인 것을 알고는 세계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한 국가의 기업 스폰은 받을 수 없다면 나홀로 삼선 유니폼이 아닌 이선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다만 결승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는 "승자" 베켄바워가 아니라 "패배자" 크루이프였다. 그해 프란츠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로 월드컵 우승,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했지만 크루이프의 혁명적인 플레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가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였다고 인정하기도 했지만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제패하고도 상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참가하지 않았다...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2008년 스페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되어 생명을 위협 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이 컸던 가족들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라고 30년만에 고백했다. 어쨌건 당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재미있게도 토탈 사커로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두 대회 연속 개최국에게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것.

4. 바르셀로나


1973년 아약스를 떠나 스페인으로 진출한 크루이프는 '독재자(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팀에서 뛰지 않겠다!'며 레알 마드리드디스하고(...) 대신 FC 바르셀로나를 택한다. 그리고 마드리에서 열린 바로 첫 경기에서 프랑코가 지켜보는 앞에서 레알을 5:0으로 떡실신시키면서 영웅 등극.
1973-74 시즌 바르셀로나는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1959-60 시즌 이후 13년 만에 차지한 영광이라 크루이프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 시즌 16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4위였다.
1979년 미국 무대로 떠날 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남긴 성적은 143경기 48골. 리그 우승 1회, 코파 델 레이 1회.

이후 명예롭게 은퇴하는가 했으나,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려먹으면서 돈 벌려고 선수로 복귀, 미국에서 2년 동안 뛰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절 PSV 아인트호벤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허정무가 그의 마크맨이였다. 1984년 페예노르트에서 은퇴.

5. 크루이프 감독

1985년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3시즌 동안 더치컵을 2회 획득했으나, 리그 우승은 실패했다. 당시 PSV를 이끌며 번번히 발목을 잡은 사람이 바로 히딩크.여담으로 2002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에게 축하와 격려를 하기도 했다.

1988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하여 사방에서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고이고체아(1988~1994), 바케로(1988~1997), 베히리스타인(1988~1995)[5], 미카엘 라우드럽(1989~1994), 로날드 쿠만(1989~1995), 펩 과르디올라(1990~2001)[6], 스토이치코프(1990~1995), 호마리우(1993~1995), 게오르게 하지(1994~1996)...훗날 전설로 남은 드림팀이 탄생했다.그리고 드림팀은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리그 우승, 크루이프 재임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가 들어올린 이런저런 컵이 도합 11개...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


<사진>크루이프와 애제자 펩 과르디올라,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을 흡수해 자기것으로 만들었고 훗날 드림팀3의 감독으로 트레블을 달성한다.[8] 여담으로 유스 시절 과르디올라는 미드필더로서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평가로 인해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박혀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테크닉과 축구두뇌를 가진걸 보고 크루이프가 1군으로 승격시켰고 팀의 핵심이 되었다.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펩에게 크루이프는 은사.

하지만 드림팀도 영원하지는 못했고, 1995년부터 2년 연속 무관에 그치자 크루이프는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는데... 2009년 카탈루냐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그 후 2015년 10월에 폐암 선고를 받고 외부에는 알리지 않은 채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결국 2016년 3월 24일에 향년 6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6. 평가


크루이프 감독의 특기할 점이라면 당연히 토탈 사커의 전도자로서 축구관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과정만 좋으면 결과는 아웃 오브 안중일 정도로, 자기 색깔을 강하게 고집했다. 메시와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팀 컬러, 물 흐르듯 패스를 주고 빠지면서 계속해서 빈 공간을 점유하며 공세를 늦추지 않는 형태, 이것이 바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에 남긴 것이다.

또한 유스 시스템으로 흥한 아약스 출신답게, 팀을 맡자마자 유스 시스템을 정비했다. 덕분에 오늘날 농담삼아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 유스라 할 만한 기틀을 마련했다. 덕분에 네덜란드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바르셀로나 최고의 레전드로 남아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마이크 잡고 언플도 자주 하고 있으니...

이런 자신의 축구관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9] 키배 설화도 자주 일으켰다. 물론 달리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 개인의 신념에 관한 것이니, 몇번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하고 몇번은 상대를 관광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혀놀림 속성은 바르셀로나 후배 사비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 크루이프가 관광당한 유명한 사례는 93-94 UCL 결승 대 AC 밀란전이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인 1993-1994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에게 4:0으로 완패당하며 드림팀이 붕괴했다. 게다가 당시 AC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누적으로 결장에 마르코 반 바스텐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겼는지 경기 전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같이 형편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 라고 도발했지만 결과는...심지어 비아냥을 들은 마르셀 드사이는 경기에서 골까지 넣었다.(...) 심지어 이 경기는 이 시즌 AC 밀란이 유일하게 한 경기에 3골 이상을 넣은 경기라고 한다(이미 그전에 챔피언스리그에서 쾨펜하겐에게 6:0, 포르투와 모나코에게 3:0으로 이긴 바 있다). 그리고 역사상 챔스 결승 최다 점수차경기. 그러나 크루이프가 실제로 한 인터뷰는 이랬다. "바르셀로나는 우승 후보다. 우리는 1992년 웸블리에서 치룬 결승 때보다 더욱 완성되었고 더욱 경쟁력이 있으며 경험이 있다. 밀란은 딱히 특별한 점이 없다. 그들은 수비를 중시하는 경기를 하지만 우린 공격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례로 자신이 호마리우를 영입한 것과 밀란이 드사이를 영입한 것을 든 것이다. 가디언의 시드 로 칼럼#

  • 반대로 관광보낸 사례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브라질. 예전 브라질과 다른 수비 축구,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온 둥가 감독에게 거 축구 졸 재미없게 하네 네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어 줄리우 밥티스타나 멜루 같은 색히나 뽑고...라고 디스를 걸었다. 둥가 감독은 노친 즐이라고 맞디스를 했으나...결국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 2010년 월드컵에서 조국 네덜란드조차 비난을 피하진 못했다. 스페인과 결승전에 앞서 나는 당연히 내 조국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한 토털 풋볼을 그들은 버렸다. 반면 스페인의 축구는 내 축구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축구가 이제 결실을 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이 우승하기를 바란다.하고 발언했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물론 네덜란드 축구의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토탈 풋볼이라는 이상만을 쫒으며,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비난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다.#

  •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인테르을 두고 안티 풋볼 드립을 쳤다. 이후로도 꾸준히 설전이 이어지는데, 무리뉴한테 넌 그저 트로피나 수집하는 기계일 뿐이지!라고 디스를 걸었는데, 주제 무리뉴는 2010-2011 국왕컵 결승 후 ㄳ. 난 트로피만 수집하는 감독이 되는 게 참 좋다.라고 응수했다. 화가난 크루이프가 넌 스페셜 원이 아니라 선수시절 별볼일 없는 듣보였다고 응수하니 무리뉴는 "아직도 과거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겐 전혀 배울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0-4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디스하며 한방 먹였다.

  • 최근 인터뷰 http://www.voetbalzone.nl/doc.asp?uid=120620에서 친정팀 아약스를 비난했는데, 그 내용이 "나의 아약스는 그러지 않아!"로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덕후임을 인증했다.

  • 권력욕도 세서 아약스나 바르셀로나가 명예직이든 뭐든 자리를 줄 땐 덥석덥석 받아먹다가 약간만 수틀리면 퇴진 후 뒷담화 시전을 자주 하는 편...은퇴 후의 행보나 주변인들의 말을 듣자면 인간성 좋다는 이야기는 농담으로도 못할 듯. 또 팀의 상황도 알지못한채 토탈 사커가 최고라능!이라고 박박 우기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에서의 그의 평가는 상당히 박해졌다. 이 양반은 지금이야 바르샤와 과르디올라가 자신이 원하는 토탈 사커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니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암흑기에 토탈 사커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을 때는 신나게 대차게 깠다.

  • 결국 2014년 들어서 바르셀로나 디스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크루이프는 라포르타 재임 시기에는 명예회장으로 있었는데, 산드로 로셀이 취임하면서부터는 구단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로셀이 횡령사건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구단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단이 재정적 이유로 유니세프 로고를 포기했다거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토탈사커를 포기하려는 듯한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클럽의 진짜 문제는 팀 내부에 있어야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난 바르사 내부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봐서는 구단 내부 복귀를 노리는 듯한데, 크루이프 말대로 유니세프 다시 달고, 티키타카로 다시 돌아가면 바르셀로나의 미래가 우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10] 구단내부 복귀는 어려울 듯하다.

  • 물론 그냥 토탈 사커 빠라고 몰아붙이기에는 선수 시절의 실력이나 위상이 워낙 넘사벽이라 까가 많은 만큼 빠도 많다. 물론 빠들도 인격을 보고 빨진 않겠지만(...) 이 어르신의 업적이 그야말로 넘사벽 of 넘사벽인지라, 한낱 고집쟁이 노친네로 몰아붙일 순 없다. 선수 시절의 업적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선수 은퇴 후 업적도 화려한 편이다. 바르샤에서 들어올린 우승컵 수도 두 자리수를 넘어가고, 위에서 말했듯이 현재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바르샤의 유스 시스템 정립에 일조한 사람이기도 하다.

  • 게다가 소위 축구계 최고 레전드라는 펠레, 마라도나가 딱히 머리가 뛰어난 인상이 아니기 때문에 유독 특출나 보이는 면이 있다. 펠레같은 경우는 저주나 망언으로 유명하며 마라도나 역시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판이 많은데 비해 이양반은 감독으로서도 대성했고, 무엇보다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놓았다 보니.[11]

7. 잡동사니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결국 1991년, 바르셀로나 감독 재임시 심장수술을 받았지만 정신못차리고 담배를 끊지 못하고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다 두차례 심장수술을 더 받은후에 담배를 끊었다. 역시 신은 공평.. 한가?

페예노르트 시절 PSV 선수였던 허정무와 대결하기도 했다. 릎팍 도사에서 허정무가 과거를 회상할 때 크루이프의 거친 플레이로 심하게 부상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팬들은 국민스타였던 크루이프에게 '크루이프 뒈져라!'라는 걸개를 걸어서 감동을 먹었다는 말을 했다.


이천수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수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천수가 크루이프 빠돌이라 존경하는 선수를 묻는 질문에 '오직 크루이프'라고 답했더니 '한국 선수들은 존경 안한다'고 기사가 나왔다(...).

그의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도 전직 축구선수로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바르셀로나에서 데뷔, 네덜란드 대표팀으로 유로 96에 뛰기도 하고[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뛰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다가 라 리가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 컵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13] 이름 요르디(Jordi)도 카탈루냐의 성인(聖人)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뛰었다. 현재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 팀의 단장 직을 맡고 있다.

8. 기록

8.1. 선수 기록


  • 아약스 (1964/65 - 1972/73, 1981/82 - 1982/83)
  • 바르셀로나 (1973/74 - 1977/78)
  • 페예노르트 (1983/84)
    • Eredivisie (1) : 1983/84
    • KNVB CUP (1) : 1983/84
  •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8.2. 감독 기록


  • 아약스 (1985/86 - 1987/88)
    • KNVB CUP (2) : 1985/86, 1986/87
    • UEFA Cup Winners' Cup (1): 1986/87
  • FC 바르셀로나 (1988/87 - 1995/96)
    • La Liga (4) : 1990/91, 1991/92, 1992/93, 1993/94
    • Copa Del Ray (1) : 1989/90
    • European Cup (1) : 1991/92
    • UEFA Cup Winners' Cup (1): 1988/89
    • UEFA Super Cup (1): 1992
    • Supercopa de España (3): 1991, 1992, 1994

8.3. 수상 실적

  • Dutch Footballer of the Year (5): 1967, 1969, 1971, 1972, 1984
  • European Golden Shoe (1): 1968
  • Ballon d'Or (3): 1971, 1973, 1974
  • Dutch Sportsman of the Year (2): 1973, 1974
  • FIFA World Cup Golden Ball (1): 1974
  • FIFA World Cup All-Star Team (1): 1974
  • Don Balón Award (2): 1977, 1978
  • Onze d'Or (2): 1986, 1987
  • FIFA World Cup All-Time Team
  • World Team of the 20th Century
  • FIFA 100
  • Golden Player of the Netherlands
  • World Soccer Greatest XI of All Time: 2013
  • World Soccer Awards Manager of the Year (1): 1987
  • Don Balón Award for Coach of the Year (2): 1991, 1992
  • Onze d'Or for Coach of the Year (2): 199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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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크루이프를 존경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14번을 달았다.
  • [2] 유래 자체가 전설에서 유래했으며, 이 전설을 소재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The Flying Dutchman)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방황하는"이라는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많지만 그 자체로 국내 음악계에서 고착되어 고유명사화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다.
  • [3] 이 시절 스카스를 주장으로 한 헝가리 국대는 일명 '매직마자르'로 불리면서 A매치 34연승이란 황당무계한 기록을 선보였다. 이들의 연승행진이 멈춘 것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으로 서독에게 3:2로 패배하였다. 16강에서 월드컵에 처음 참가한 대한민국 대표팀이 9:0으로 발린 경기도 포함이다.
  • [4] 간접 페널티킥은 몇몇 리그에서는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EPL이나 세리에 A등으로 기억하는데, 아시는 분 추가바람.
  • [5] 은퇴한 뒤 바르셀로나 단장직에 올랐다.
  • [6] 은퇴한 뒤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었고, 2008~09시즌 트레블을 달성했다.
  • [7] 여담으로 게리 리네커(1986~1989)도 영입되었는데, 리네커를 주전으로 쓰지 않자 영국언론들이 크루이프를 비난했다.
  • [8] 티키타카 전술의 골자인 "짧은 패스를 통한 공의 소유와 압박으로 공간을 선점"은 크루이프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털 풋볼 철학을 만든 리누스 미헬스가 있다
  • [9] 머리도 좋고 천재인 것도 맞는데, 성질머리가 지랄맞다. 이건 바르셀로나 팬들도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
  • [10] 유니세프 문제는 재정적 여건이 허락을하지 않고, 티키타카를 다시 강화하는 것은 2014년 시점에서는 무리가 되어버렸다.
  • [11] 그러나 마라도나는 몰라도 펠레는 체육부 장관직까지 역임한 노련한 정치인으로 축구계 위상으로 보나 뭘로보나 크루이프보다 더 출세했으면 했지 못하지 않다. 작금의 그의 이미지는 그저 외국인들이 쉽게 접할수 있는 코칭스태프에서 활동한게 아니고 미디어가 만들어준 저주 이미지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 [12] 히딩크 감독이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
  • [13]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막판 골든자살골이 작렬하며 5-4로 석패했고, 팀은 지금 2부 리그인 리가 아델란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