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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last modified: 2018-01-30 02:25:39 Contributors


황선홍 감독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원 안의 사진은 선수 시절의 모습. 잘 보면 황선홍 감독 주변으로 조광래, 박성화, 홍명보의 얼굴도 보인다. 어째 죄다 욕먹는 분들 사실 삿대질이리 카더라


J리그 1999년 득점왕 시절 동영상

포항 스틸러스 감독
황선홍 (黃善洪 / Hwang Sun-Hong)
생년월일 1968년 7월 14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예산군
가족관계 아내, 슬하 2남 1녀[1]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183cm
유스팀 건국대학교 (1987~1990)
소속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아마추어 (1991)
부퍼탈 SV 보루시아 (1992)
포항 스틸러스 (1993~1998)
세레소 오사카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0~2002)
가시와 레이솔 (임대) (2000~2002)
전남 드래곤즈 (2002~2004)
지도자 전남 드래곤즈 코치 (2004~2006)
부산 아이파크 (2008~2010)
포항 스틸러스 (2011~)
국가대표 103경기 50골

2013년 K리그 클래식 감독상
최용수(FC 서울) 황선홍(포항 스틸러스)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199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황선홍
FW
노상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김현석
MF
판근
MF
아미르
DF
영일
DF
홍명보
DF
기태
GK
사리체프

Contents

1. 소개
2. 선수시절
2.1. 데뷔 및 K리그에서의 활약
2.2. 비운의 미국월드컵
2.3. 국제무대에서의 활약과 불운
2.4. 2002월드컵에서의 부활
2.4.1. 폴란드전
2.4.2. 미국전
2.4.3. 이탈리아전
2.4.4. 스페인전
2.5. 선수로서의 평가
3. 지도자 시절
3.1. 전남 드래곤즈 시절(2003 ~ 2006)
3.2. 부산 아이파크 시절 (2008 ~ 2010)
3.3. 포항 스틸러스 시절(2011 ~ )
3.3.1. 2011 시즌
3.3.2. 2012 시즌
3.3.3. 2013 시즌
3.3.4. 2014 시즌
3.3.5. 2015 시즌
4.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 편
5. 기타

1. 소개


1990년대 대표팀을 책임진 만능 공격수.[2]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킬러(5골)[3]이자 90, 94, 98, 02 월드컵 대표였던 한국 축구의 레전드, 대한민국의 득점기계. K리그부산 아이파크 감독. 당연히 K리그 30주년 베스트11에도 같은 포항 소속이었던 홍명보와 같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4]

그리고 자신의 절친과는 다르게 2군코치라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리그를 대표하는 명감독 반열에 오른 훌륭한 지도자.

선수 시절에서는 K리그 포항 스틸러스(1993~1997), J리그 가시와 레이솔(1998~1999) 등에서 활약했으며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해설자,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거쳐 2011년부터 친정 팀인 포항 스틸러스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 별명은 황새[5]. 슬라이딩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이 유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아니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아마도 단군 이래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선수이자, 가장 저평가된 비운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욕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무병장수하실 분
황선홍:동국아, 주영아. 힘내. 너희들이 욕먹은 건 나에 비하면 상대도 안돼. 얘네들은 빠들이라도 있었지
득점률은 차범근보다도 높은데[6] 욕은 박주영보다 더 많이 먹었다(...)

등번호 18번. A매치 103경기 50골.(역대 득점 순위 2위, 1위는 차범근)
선수생활 25년, 대표팀 경력 14년.
그 가운데 대수술 3회, 부상기간이 3년.
02년 6월 4일. 월드컵 폴란드전 골. 이탈리아전에서 센츄리 클럽 가입
03년 2월 9일.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은퇴 선언.
07년 ~ 10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0.11.08 ~ 포항 스틸러스 감독.

90년 월드컵 지역예선 득점왕 6경기 7골
94년 아시안게임 득점왕 11골
94년 아시아축구연맹선정 득점왕 A매치 16골
95년 K리그 8게임 연속 득점[7]
99년 J리그 득점왕 24골 8어시스트

아래는 지도자로서의 업적

K리그 우승 1회 (2013)[8]
K리그 3위 2회 (2011, 2012)
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 2회 (2012, 2013)
대한축구협회FA컵 준우승 1회 (2010)
2013 K리그 클래식 감독상 수상

2. 선수시절


2.1. 데뷔 및 K리그에서의 활약

1988년 11월 7일 이회택 감독이 건국대학교의 무명 선수 황선홍을 대표팀에 발탁했을 때 엄청난 구설에 시달렸으나[9] [10] 데뷔전인 한일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 이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골 잔치를 벌이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각광받는다. 이때 또 다른 고려대학교의 국가대표 선수였던 홍명보와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일생의 벗이자 1990년대 한국축구를 이끈 쌍두마차가 된다.

하지만 1990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이 3패로 탈락하면서 김주성과 황선홍 두 공격수가 비난을 받으면서 첫번째 시련을 겪게 되고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아마추어팀이었고 [11] 1992년 부퍼탈로 이적했지만 9경기를 뛰고 무릎부상(십자인대 파열)로 한국으로 리턴.[12]

이 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 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전북 현대 모터스[13]포항 스틸러스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신생 팀이던 전북은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된다. 이 때 포항에서 트레이드된 선수 중 한 명이 이흥실이었다.[14]

이후 같은 소속팀의 홍명보, 라데, 문식, 박창현, 태하 등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 본인은 신문과 인터뷰 하길 "나와 라데의 투톱을 능가하는 투톱은 이후로 K리그에 없는 듯 하다."라고. 95년에 바로 8경기 연속골 기록을 세웠다.

Hwang_Sun-Hong_Cerezo_Osaka.jpg
[JPG image (Unknown)]


1996년 포항 스틸러스의 FA컵 우승, 1997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 리그)에 일조했지만 아쉽게도 정규리그 우승컵은 차지하지 못했다. 1995년의 준우승이 전부. 이후 1998년 J리그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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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같은 팀이었던 데니스와 경기 중 드잡이질[16]을 한 끝에 맞트레이드 형식[17]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를 가게 된다.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 유종의 미를 거둔 다음 2002년 하반기에 포항 스틸러스의 자매구단인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했지만 이적 직후 얻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2003년 은퇴하였다.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는 할 수 없다. 대신 감독으로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으니 지도자로서 K리그의 레전드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18]

2.2. 비운의 미국월드컵


전설의 94년 황선홍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불운은 계속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황선홍은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볼리비아전에서 그는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아 슈팅을 날리지만 모두 골문을 외면하고 만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월드컵 출전국의 수는 24개국이었다. 각 조 2위까지 12개 국가와 3위 중 성적이 좋은 4개 국가가 16강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만[19] 올리면 16강이 유력했다. 첫 경기에서 강적 스페인과 비겨 첫 단추를 잘 끼웠지만, 확실한 1승 상대로 여겼던 볼리비아전을 비기고 말았다. 당시 조 편성은 우승후보 독일, 스페인 그리고 첫 진출국 볼리비아였다. 따라서 독일, 스페인과 최대한 비기고 볼리비아를 이기는 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물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여서 한국-볼리비아전은 사생결단의 혈투가 됐다.[20]

볼리비아전 하이라이트를 보면 알겠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뜰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슛이 뜨기는 했다. 이 경기 이후 황선홍은 오랫동안 이름 앞에 '똥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94년의 황선홍은 단군 이래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운동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2002년 안톤 오노보다 더한 욕을 먹었으니, 이때 황선홍 선수가 받은 모욕과 협박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거의 범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유행하던 말은 "이완용 이래 최고 역적"이다.

하지만 다음 경기인 독일전에서 0:3으로 끌려가던 후반에 추격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그였다. 경기 영상을 보면 월드컵 사상 첫 골을 기록했음에도,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다. 골을 넣은 후 침을 뱉으면서 씁쓸해하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당시의 심경을 밝히길 "왜 이제서야 들어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홍명보가 회심의 중거리 슛을 성공하며 3:2로 따라잡은 것에서 경기가 끝나긴 했지만, 독일전 후반은 사실 한국이 독일을 압도하고 있었다. 엄청난 무더위로 보스턴 경기장은 40도를 넘나들고 있었고, 독일은 체력이 방전상태였다. 경기가 5분만 계속됐어도 한국이 독일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평가였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홍명보가 훗날 술회한 바로는 쏟아지던 무자비한 비난 때문에 황선홍에게 트라우마가 생겨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감독님, 저 이번엔 정말 잘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계속 쏟아지는 비난에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본인은 당시에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회상한다. 굳이 인터넷이 없어도 직접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 집 밖엘 나가지 못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98 월드컵 이후 J리그에 진출하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몸 관리를 더욱 철저히 했다. 모 스포츠 사이트와 이루어진 비공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내비친 바 있는데, '난 은퇴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에 다시 돌아갈 것이며, 월드컵에도 가능하다면 꼭 다시 나가고 싶다. 그래서 나를 비난했던 많은 사람에게, '당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은퇴할 것이다.'라고 했다.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2.3. 국제무대에서의 활약과 불운

이후에도 황선홍은 국가대표팀의 붙박이 공격수로 활약한다. 미국월드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8강 토너먼트에서 일본한일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친다. 특히 이 경기는 역대 한일전 중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명승부 중의 하나인데, 미우라의 선취골로 끌려가다가 후반전 황선홍의 절묘한 힐패스를 받은 유상철이 동점골을 뽑아낸 후에 황선홍의 헤딩 역전골, 그리고 다시 일본의 이하라가 중거리 슛으로 다시 동점, 하지만 후반 종료 직전 황선홍이 스스로 페널티킥을 얻어내어 직접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월드컵에서의 비난을 어느 정도 씻어내는 맹활약이었다.

또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친다.

그 무렵까지 황선홍은 비록 미국 월드컵의 이미지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아직 그를 능가할 만한 공격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 A매치 때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기에 축구팬들은 그에게 어느정도는 다음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었다. 황선홍 자신에게도 그건 가장 절실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절치부심하던 황선홍은 1997년에 또다시 무릎이 아작난다.[21] 그러나 황선홍은 오직 월드컵만을 바라보며 재활에 매달린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황선홍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 하지만 국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사이 대표팀 간판 공격수 자리는 무섭게 등장한 신예 최용수가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7년 아시아 최종예선은 그야말로 최용수의 독무대라 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도쿄대첩을 비롯하여 대표팀은 황선홍 없이도 승승장구하였다. 그 기간동안 황선홍은 묵묵히 재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월드컵을 두 달 앞둔 98년 4월 재활에 성공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복귀전은 숙명의 라이벌 일본. 도쿄대첩의 성과가 무색하게 그 당시 대표팀은 일본에게 A매치 2연패 중이었다.[22] 일본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의 없는 벼랑끝 승부. 최악의 분위기 속 황선홍의 컴백.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시나리오였다. 4월 1일, 비 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 선발 출전한 그는 전반에는 적응이 덜 된 듯한 플레이를 보이며 똥볼(...)도 한 차례 기록한다. 한 골씩을 주고 받은 1:1의 스코어에서 후반 27분, 서정원의 절묘한 패스를 받은 황선홍이 골키퍼 가와구치와 일대일 상황을 맞이한다. 황선홍은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면서 골키퍼 앞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와중에 떡진 잔디밭은 축구공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놔두질 않았다. 당황한 황선홍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골키퍼와 일본 수비수들과 뒤엉키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대로 슈팅 찬스가 날아가고 마는구나... 하는 순간, 혼전의 양상 속에서 누가 차 올렸는지 축구공이 위로 튀어오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황선홍이 있는 힘껏 뛰어올라 바이시클 킥으로 축구공을 골문 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대로 골이 된 것이다. 골을 확인한 황선홍은 본부석 쪽으로 달려오면서 몸을 날려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한다.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황선홍의 화려한 컴백으로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피파 랭킹 3위였던 체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두 선수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하여 2:2 무승부를 거두기도 했으며,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은 현재 대표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다."라 평하기도 했다.

허나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펼쳐진 중국과의 친선경기[23] 에서 황선홍은 골키퍼에게 태클을 당해 부상당하고 만다.[24]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금도 소림축구로 악명이 높지만 1998년에는 훨씬 심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중요한 평가전을 실력이 높은 팀이 아닌데다가 한국에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플레이가 거친 중국팀과 하다가 괜히 중요한 선수들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냐는 비난이 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그 경기에서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로 무릎이 박살났다. 당시 인대 끊기는 소리가 경기장에서 들렸을 정도라고 하는데 뭐 어느정도 과장이야 있었을지언정 TV화면 너머로 보는 국민들 눈에도 황선홍의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예감이 스칠정도의 살인태클이었다. 그는 22인의 엔트리에 들어 프랑스로 향했으나, 부상은 심각했다. 단 한 경기라도 뛰어보고자 무릎에 진통제를 여섯 번 맞았다. 그러나 결국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때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황선홍을 싫어했으면, "저번 월드컵처럼 실수할까봐 무서워서 경기에 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난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야. 니들 무릎이 함 아작나 죽어봐야 정신차리지?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은 이제 '황선홍의 월드컵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한국나이 31세였으니 당장 은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더 이상 그를 동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황선홍은 도망치듯 일본 J리그로 건너간다. 그리고 99년 시즌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여전히 그의 건재함을 증명한다.

2.4. 2002월드컵에서의 부활

이렇게 불운하기만 하던 황선홍의 국가대표 커리어였지만,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대회였던 2002년 월드컵에서 황새는 날개를 폈다. 히딩크는 황선홍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으며,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 선발 투입힌다. 황선홍으로서는 인생 마지막 최후의 도전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월드컵 개막 직전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선언까지 한 상태였다.[25]

2.4.1. 폴란드전


한 방에 인생역전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황선홍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경기가 되었다. 전반 25분 경에 이을용의 낮은 크로스를 논스톱으로 골문 구석으로 차 넣어 선취골을 뽑아낸다. 당시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두덱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적인 골이었다.[26] 황선홍은 곧바로 벤치에 있는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가 선수들과 함께 포옹한다. [27] 결국 이 한 골은 폴란드전의 결승골이 되었고, 황선홍의 인생골이자 명예회복의 한 판이 되었다. 이 경기는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번째 승리이다. 첫 승의 포문을 연 첫 골, 결승골을 작렬시키며 제대로 인생골을 집어 넣었다.

2.4.2. 미국전

미국전은 여러 모로 아쉬운 경기였다. 이상하게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전방 공격수인 설기현은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 똥볼만 죽어라 날려댔고, 재익은 이를 비난하느라 바빴다(...) 황선홍은 미국월드컵때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였는지(...) 계속 설기현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반 중반에 미국 선수와의 충돌로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투혼을 살려 붕대를 두르고[28][29] 그대로 경기에 임했으며 심지어는 머리를 다친 그 상태로 헤딩까지 했다. 30대 중반, 노장의 투혼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참고로 이 경기가 A매치 99경기째였는데 다음 포르투갈전에 출전하면 100경기 출전으로 센츄리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밝혔었고 포르투갈전에서 만약 지면 그걸로 탈락인 상황. 그런데 정작 히딩크 감독은 이런 사실(100경기)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고 이탈리아전에 그를 투입했다고 밝혔다.

2.4.3. 이탈리아전

이탈리아전은 후반 한 골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교체투입되었고, 후반 막판 절묘한 2대1 패스로 설기현의 동점골에 기여했다.
연장전에서는 수비벽을 쌓고 점프하는 선수들 밑으로 허를 찔러 깔아 찬 프리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부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골도 가능했다. 그런데 그 프리킥은 의도하고 찬 게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당시 코치였던 최진한의 인터뷰에서는 J리그에서도 그렇게 몇 번 그런식으로 찬적이 있어서 일부로 노리고 찬것이라고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걸로 봐선 원래 의도한 바가 맞는듯...외부링크

2.4.4. 스페인전

스페인전에서는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섰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어서 히딩크가 1번으로 세웠는데, 결국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골키퍼 카시아스가 방향을 잘 잡았지만 겨드랑이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다행히도 골이 되었다. 황선홍이 훗날 밝히기를, 그 킥은 제대로 차지 못한 실패한 킥이었다고 한다.왜이리 실수가 많어 어쨌든 5번 홍명보까지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국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다. 4강이 확정되는 순간 황선홍과 홍명보가 힘껏 포옹하는 장면은 한국축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장면이다. 그동안 불운과 좌절도 많았지만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2.5. 선수로서의 평가

황선홍의 실제 활약과 플레이는 매우 탁월했지만, 근성, 저돌 같은 단어와 거리가 먼 세련되고 영리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또한 축구인생에 전환기를 맞이할 즈음이면 공교롭게도 크고 작은 부상이 닥쳐와 부침이 극심했다. 동시대 공격수인 '독수리' 최용수가 A매치 67경기 27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선홍보다 더 활약했다고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이 문서에 기록된 것도 상당히 순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직후 황선홍의 위치는 거짓말 조금만 보태면 제2의 이완용정도였다. 당시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설레발이 어떻게 사람 하나를 병신으로 만드는지도...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선수'라는 평가가 있다.

그래도 독일전에서 제대로 알까기를 선사한 골키퍼 최인영의 활약 덕분에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끝난거다. 정말 4년동안 벼르고 별러 출천한 1998년 월드컵에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얻은 부상으로 뛰지 못함에도, 새가슴이라 출전을 거부했다는 루머때문에 천하의 개쌍놈으로 낙인이 찍혔다.

사실 황선홍은 선수시절 명예회복이라도 했으니 다행이지만...최인영은 월드컵 후 2년만에 은퇴하는 바람에 그의 전설적인 알까기는 낙인처럼 찍혀버려 현재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 안주거리로 씹히고 있다.

이 시절 그의 이야기는 2006년 5월 22일 방송된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편에 잘 표현돼있다. 선홍이형 그동안 까서 미안해 ㅜㅜ 1990년대부터 그를 지켜본 축구팬이라면, 1994년 월드컵의 그를 본 사람이라면 2002년 정말 죄책감을 느낄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회택-차범근[30]-최순호-황선홍-안정환-???으로서 그 다음 자리에 들어갈 선수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일단 이동국이 흔히 거론되었으나 국제대회 활약이 아쉽고, 박주영이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나 최근 몇 년간 벤치만 달구는 중이다.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둘 다 역대 한국 A매치 득점순위 10위 안에 들어가는 성적이다.

여하간, 02년 이전에는 이동국+박주영+염기훈+오범석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까였다. 사실 이 서술조차 부족한 게, 한때는 '대한민국 역사상 김일성 다음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할 정도이다. 적어도 2014년 1월 현재까지는 욕먹은 거로는 비교가능한 선수가 없다. 동네축구에서도 누군가 똥볼을 차면 '이런 황선홍 같은 놈'이란 욕이 횡횡하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김정일이 2위, 김정은이 3위. 근데 박주영이 이번에 제대로 눈도장 찍어서 어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무리가 좋으면 후대 평가도 다 좋아진다는걸 잘 보여준 사람. 물론 그간 황선홍을 깠던 것이 정당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번의 활약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된 것이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인지 국대 스트라이커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많이 표시한다. 예를 들어 박주영이 한창 까일 때에도 이 정도는 너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적도 있고, 이동국의 경우에는 포항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는 듯한 발언을 많이 한다. 2013년 올스타전에서 제 2의 황선홍으로 노장 축에 속하는 이동국을 뽑기도 했다. 이 올스타전에서 이동국은 '축제'라는 경기 특성 상 잘 쓰지도 못하고 잘 쓰지도 않는 개인기를 선보였었는데 경기장에서 노골적인 야유를 들었고, 저 발언 이후에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도 많이 들렸다.

3. 지도자 시절

3.1. 전남 드래곤즈 시절(2003 ~ 2006)

2003년 2월 은퇴를 선언한 뒤, 곧바로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로 취임 본격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영국으로 건너가 4개월간 연수를 받았다.

2005년 허정무 감독이 부임하면서 1군 코치로 승격했다. 같은 해 9월 조 본프레레 감독이 사임하고 새로이 대표팀에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부임하면서 대표팀 코칭 스텝에 합류한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그 자리를 홍명보가 꿰차면서 낙마한다.[31]

2006년 허정무 감독은 황선홍을 수석 코치로 승격시킨다. 한편 월드컵이 끝난 뒤 새로이 대표팀에 핌 베어백 감독이 부임하면서 새로운 대표팀 코칭 스텝으로 유력하게 꼽혔으나 역시나 낙하산 인사홍명보가 계속 남으면서 다시 한번 고배를 마신다. 이해 전남은 FA컵을 차지했고, 12월 계약기간이 만료된 황선홍은 구단과 허정무 감독의 재계약 권유를 거절하고 독일 유학을 통한 재충전을 결심한다.

이처럼 대표팀 코칭스태프라는 성골 자리에서 거푸 밀려나면서 사실상 황선홍의 지도자 역정은 시작부터 좌초하는 듯 했다. 그러나...

3.2. 부산 아이파크 시절 (2008 ~ 2010)

2008 시즌부터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맡았다. 전반기 리그는 만년 꼴찌 광주보다 못한 성적을 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었으나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후반기 리그에 접어들면서 부산의 플레이가 나아지면서 실력을 입증했지만 전반기를 워낙 망쳐서 다음 시즌을 기약하고 있다. 그러나 2009 시즌에도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채 하위권에서 마쳤고 계약 마지막해를 맞이했다.

한 시즌에 한 골만 넣는 공격수라 조롱받던 정성훈을 수준급 공격수로 조련하고 박희도 등 주목할 만한 신인 선수들을 육성하며 찬사를 받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찍은 황선홍 밴드라는 광고가 대박을 치며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5월 26일 무릎팍도사 출연분 찰영을 마쳤고(6월 23일 방송), 6월 13일엔 2002년 당시 활약한 선수들과 함께 남자의 자격의 앞부분에 잠깐 출연했다.

2010년 부임 3년째를 맞아 거의 리그 꼴지 수준의 전력인 부산 아이파크를 시즌 초반 6강권에 올려놓고 FA컵에서도 결승까지 올랐으나 하위권팀의 고질적인 선수 부족에 따른 리그 후반 부상+체력저하를 이기지 못하고 이번에도 6강 진출에 실패. AFC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놓고 수원 삼성과 홈에서 벌인 FA컵 결승에서도 나름 분전했으나 0:1로 패배함으로서 부임이후 수원 삼성을 한번도 이기지 못하는 천적 관계만 다시 확인했다. 수원을 죽입시다. 수원은 나의 원수.

FA컵 결승에서 ACL 티켓을 확보하면 부산에 1년 더 남아 내년도 챔피언스 리그를 준비하려 했던 것 같지만 이 마저 실패하면서 슬슬 부산과 결별을 암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11월 5일자로 부산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며 결별을 확정지었다. 부산 아이파크에 유망주 육성, 선수수급에 나름 건의를 했던 것 같지만 부산 아이파크가 K리그에서 알아줄 정도로 프런트가 무능한 구단이다 보니 본인도 한계를 느낀 듯.[32] 3년간 힘겨운 시간이 많았지만 경험이 쌓이고 나선 그 시련을 어느정도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통해 지도자로써 어느정도 인정을 받는 단계까지 왔으니 지난 3년이 아주 마이너스 인것만은 아니었다.

3.3. 포항 스틸러스 시절(2011 ~ )

3.3.1. 2011 시즌

그리고 2010년 11월 8일, 포항 스틸러스 신임 감독으로 선임 되었다. 여전히 빅영입도 없고 설기현마저 울산으로 야반도주이적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듯이 시즌 개막후 승승장구. 포항 레전드 출신이라는 시너지 효과까지 더해져 선수인 후배들과 포항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파리아스 시절의 재림을 꿈꾸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포항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팀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이다.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클럽인 만큼 선수들이 자긍심을 갖는게 맞다"면서 포항은 2010 시즌의 부진을 말끔히 털어내고 2011시즌 정규리그 2위를 확정. 황선홍 감독이 부산 감독 시절부터 학수고대하던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과 플레이오프 직행에 성공하여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리나 했으나...

여전히 큰 경기(토너먼트, 결승전)에 약한 모습을 보이며 2011 K리그 챔피언쉽 플레이오프 단판경기에서 울산 현대 호랑이에 0:1로 석패. 지긋지긋한 감독 콩라인(...)만 계속 이어나가게 되었다. 이 날 경기는 여러모로 모따의 X맨 플레이와 PK를 2개 모두 날린 황진성, 모따의 불운과 울산 골피커 김승규의 미칠듯한 선방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반 중반 이후 꼬인 경기를 풀지 못하고 대안 없이 공격수만 집어넣는 모습을 보이며 패배를 자초한 면도 있어 포항 팬들 역시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의견이 대세. 덤으로 AFC 챔피언스리그도 태국 FA컵 우승팀과의 단판승부의 결과에 따라 진출이 결정되게 되었다. AFC를 죽입시다. AFC는 나의 원수 다행히 2012년 2월 시즌 전 열린 ACL 플레이오프 단판에서 태국의 촌부리 FC에 2:0 승리. 부산 아이파크 시절부터 염원하던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하긴 2011 시즌을 돌아보면 부상자는 별로 없었지만 승부조작 관련으로 수비진 한 축이 무너지고[33] 초반에 날린 용병들은 중반이후 돌아가면서 삽을 푸지, 유망주들도 시즌 중반 이후 닥버로우를 하지 않나, 결정적으로 슈바의 부상 이후 포스트 플레이는 완전 배제된 상태에서 전략을 짜다 보니 시즌 하반기 내내 지는 경기는 별로 없어도 똥줄 타는 경기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2012 시즌에도 포항의 스쿼드는 지금에 비해 나빠지면 나빠졌지, 그렇게까지 좋아질 것으로 보여지진 않으므로 2011에 성장한 신인들과 남은 자원을 얼마나 추스려서 2012 시즌에 성과를 보여주느냐가 관건일 것 같다. K리그 감독으로 5년차를 맞는 만큼 더 이상 신인감독이라는 실드도 바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일부 포항 팬들의 우려는 2012 시즌에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3.3.2. 2012 시즌

2011 시즌 포항을 먹여살리던 수비가장과 미들가장(...)인 김형일, 김재성은 고스란히 상주 상무 불사조이적입대. 모따는 2011 챔피언쉽 리그를 거하게 말아먹고 브라질로 도망갔고 슈바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결국 자유신분으로 풀어줌으로서 광주로 보냈다. 그리고 이 공백을 매꾸기 위해서 황선홍 감독이 고른 선수는 루마니아 국대 출신 지쿠와 세르비아 출신 공격수 조란. 그리고 대전 시티즌에서 활약했던 박성호강원 FC에서 임대를 받은 김진용.

시즌 전 네임벨류만 놓고 보면 어느 하나 떨어질 것이 없는 선수들이었으나...시즌이 개막하고 14라운드가 진행된 현재 포항의 성적은 5승 3무 6패. 게다가 아시아 챔스리그도 조별리그 마지막 FC 분요드코르전에서 슈팅수 2개라는 치욕적인 내용끝에 결국 조별리그에서 탈락해버렸다. 상위, 하위 스플릿이 갈리는 K리그 30라운드 중 아직 14라운드 밖에 진행되지 않았으나 홈에서 대전에 비기고, 경남에 털리는(...) 등 들쭉날쭉한 경기력과 중하위권으로 처친 순위 때문에 포항 스틸러스 공식 홈페이지는 찬양 일색이던 글들은 어디로 가고 하루가 다르게 폭격을 맞고 있는 상황.

가장 큰 문제는 세르지오 파리아스 시절 한준희 해설위원으로부터 포스날이라고 까지 칭찬을 받던 포항 특유의 미들 축구가 완전히 경직되어버렸다. 2011 시즌까지는 그럭저럭 김재성, 신형민, 황진성미들에서 신내고 경기는 지는 미드필더진이라도 건재했으나, 2012 시즌에 들어서 김재성이 이탈하면서 특유의 패스워크 축구가 죽어버렸다.

사실 전임 파리아스 감독 못지않게 미들진 운용을 중시하는데, 이게 도가 지나쳐 아집에 가까울 정도라 팀전술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 전술한 분요드코르전이었다. 슈팅을 못날린 게 아니라 그 잘난 공격작업 하느라 바빠서 2개밖에 안날렸다. 패하면 끝인 상황이었는데도!

요약하자면 시즌 내내 허리에서 공격작업은 활발히 벌이는데, 막상 전방에서 효율적인 공격이 전혀 안된다. 한마디로 멋있지만 병신같아.(...)

게다가 2011 시즌 이후 통감했던 장신 공격수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영입한 박성호는 기대 이하, 오히려 대전 시절보다 활약이 떨어진다. 덕분에 박성호를 기용한 경기에선 '아사모아신광훈을 이용한 측면 공략 -> 중앙으로 크로스 -> 박성호 로또'라는 단조로운 뻥축구로 일관하고 그나마도 성과가 아예 없다(...).

또한 박성호 외에 고무열, 지쿠 등 2012 시즌 현재 주전급 공격수들이 몽땅 삽을 푸는 상황이라 달리 방법을 찾기가 힘든 지경이다. 심지어 수비수 마저 1군 스쿼드에 자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이적생들이 다 삽을 푸는 상황"에서 감독으로서 답이 안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지쿠는 본인이 직접 관찰하러 가는 등 영입에 공을 들인 케이스인데 결국 사용법을 찾지 못하고 강원 FC로 6개월 임대를 보내버렸다.[34][35]

그나마 김재성의 빈자리를 이명주와 같은 신예들로 어떻게 매꾸고, 김형일의 대체자로 김원일, 김광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주면서 수비 역시 시즌 중반을 기점으로 안정을 찾고 있다. 그놈의 공격수들이 문제지

워낙 공격진이 답이 안나오니 시즌 중반부터는 붙박이 공격수도 없이 그때그때 선수를 바꿔가며 쓰고 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포기하면 편해아예 최전방 공격수가 없이 유로 2012에서 스페인이 보여준 일명 "제로톱(4-6-0)" 전술을 도입하여 홈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홈에서 5:0으로 발라버리는 등 어떻게든 전술로 커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후 상주 상무 불사조에게 홈에서 0:1로 지면서 다시 한번 불안한 경기력을 노출해 팬들의 성토를 받고 있다.

사실 리그 최고수준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포항의 미들축구지만, 포항을 상대로 맞불을 놓는 팀에게만 쏠쏠히 먹힌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중하위권 팀이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고 우주방어로 나서면 90분 내내 공만 돌리다가 아무것도 못해보고 끝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덕분에 승점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상승세를 타고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갈만하면 고꾸라지고 또 올라가려다 고꾸라지고...무한루프.

이는 팀보다 감독 개인의 축구철학에서 비롯한 문제라, 포항 팬들은 아스날 팬들이 그렇듯 적응을 하거나 아니면 당분간 계속 뒷목을 붙잡아야 할 듯 싶다(...).

허나, 앞에 서술한 상주 상무와의 패배 이후 6월 이후로 급 반전! 이게 다 제로톱과 유스 덕분입니다 6월 이후 K리그 전체 팀 가운데 10승 2무 4패로 16개 팀 중 가장 성적이 좋다! 결과뿐 아니라 내용도 뛰어나다. 공격적인 장면이 가장 많이 나오는 팀인 것은 위에 서술했다시피 여전했는데, 기존에 득점해야 할 때 득점을 못 해주던 공격수들을 일단 제하면서 수원전에서 처음 선을 보인 제로톱 전술을 쏠쏠히 써먹기 시작하면서, 이 과정에서 미드필더인 황진성과 아에 공격진을 배제하는 제로톱 전술에 위기간을 느낀 공격수 박성호, 노병준, 고무열이 골고루 득점을 해 줌에 따라 팀 성적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결국 승점 50점으로 5위를 거둬 상위 스플릿에 들었다. 일정도 재미있는 것이, 첫 4연전은 전부 원정이고 후반은 모두 홈경기. 게다가 빅버드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다시 한 번 꺾었다. 2010년 이후 빅버드 원정에서 승리가 없었던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엄청난 상승세. FA컵에서도 4강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꺾고 결승에 올라 황선홍 감독 개인으로서 두 번째로 FA컵 정상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서 상당히 고전하였으나 119분에 터진 박성호의 버져비터로 승리!! 매니저 커리어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선수들과 함께 펑펑 울고 선수시절에도 하던 철망 세레머니를 보여주는등 여러모로 특별한 장면이 많이 연출되었다.


리그에선 FC 서울의 독주로 사실상 우승은 멀어졌지만, 닥치는대로 상위스플릿 팀들을 때려잡으며 깡패짓[36]을 하며 리그 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고 시즌을 끝마치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한때 팬들 사이에서 퇴진 운운하는 의견까지 나올정도로 2012 시즌 초중반 암울했으나[37], 똑같이 용병과 이적생들이 삽질푸는 가운데 결국 답을 못찾고 2012 시즌을 통째로 말아먹은 이웃팀과 달리 포항의 장점인 유스시스템을 통해 김재성, 신형민의 빈자리를 매꿀 진호, 이명주와 같은 신인들을 찾는 한편, 시즌 중반 공격진들이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제로톱 전술을 꺼내는 등 시즌 내내 위기를 넘기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여기에 감독만 꾸준히 믿고 있던 공격수들의 포텐 역시 터지면서 파리아스가 떠난 이후 미들만 남고 싸그리 붕괴되었던 팀을 다시 복구하는 한편 세대교체 및 체질개선에도 성공하였다. 덤으로 감독님도 레벨업

특히 2012시즌 장착한 제로톱 전술은 이후 2013시즌에도 공격진이 부진할 때 마다 포항의 강점인 미드필더들을 이용하여 경기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전술로 자리잡으면서 2013 시즌의 호성적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38]

요약하면 사실 2011 시즌 초반의 호성적은 포항의 불안요소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상황이었고, 2011 시즌 후반 ~ 2012 시즌 중반까지 이어진 각종 악재를 버티고 이겨나가는 가운데 초짜 감독에서 어느 정도는 다른 K리그 팀의 명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는 점이 크다.

3.3.3. 2013 시즌

사진은 닥터 진의 흥선 대원군과 합성한 것인데 복장이 고증오류이다. 저 복장에 대해선 흥선 대원군 항목 참조]

2012 시즌 막판에 보여준 대선전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여기에 요태까지 그래왔던 FA삽질만 안 하면 2013 시즌 충분히 상위권에 우승도 할 수 있는 거 아님?"하고 기대했으나 모기업 포스코의 경영사정 악화[39] 아예 용병 따위 없이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즌을 시작하며 공격수가 없어 한이 맺힌인터뷰를 하는데 "개인적 목표는 이동국이나 김은중 같은 선수를 2명만 만드는 것이다"[40] 지금필요한건 당장 해결이 안되니 키워보겠다는 심정이라 참으로 짠하다...고무열 보고있나? 황감독님이 직접 하사한 18번 백넘버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유스 출신 선수들이 끈끈한 조직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하며 10월까지 리그 1위를 수성중. 듀문어를 비롯한모든 축구전문가들이 포항은 내려간다며 시즌 내내 포항의 하락을 점쳤으나 끝내 1라운드 1위로 상위스플릿에 진출하여 상위스플릿에서도 1위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리하여 붙여진 별명이 황선대원군이다. 허나 본인은 이 호칭을 썩 달가워하지만은 않는 듯하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도 용병 쓰고 싶은게 당연하고 모기업의 사정이 좋다면 당연히 외국인 용병을 쓸거라고 밝혔다. 모기업 사정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조금은 지나친 별명이 아닌가 싶다는 게 본인 의견[41]. 더욱이 이런 사정을 모르는 존 듀어든은 대뜸 용병 안 쓰는 포항은 망해야 한다(...)는 식으로 칼럼을 써버리는 바람에 포항과 국축팬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있고 포항팬들은 시즌 끝나고 두고보자며 잔뜩 벼르고 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듀어든은 망했어요.

어쨌든 이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포항 스틸러스는 5월까지 2012 하반기 부터 19게임 연속 무패를 달리며 K리그 클래식에서도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으며, AFC 챔피언스 리그 역시 16강 진출이 코앞에 뒀으나...결국 용병 공격수가 없는 한계와 중요한 순간에서 경직된 전술을 사용하는 한계를 드러내며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 예선 탈락했다.

하지만 ACL 탈락으로 어수선해질 수도 있는 팀을 추스리고 K리그 클래식 1라운드의 반환점인 14경기인 제주 원정까지 승리로 장식한 후, 7월 초 위기가 있었으나 FA컵 4강 진출, 8월 말 현재 리그 1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리그 1라운드를 1위로 마치고 상위스플릿만 남은 9월에 들어서 험난한 일정으로 조금 삐끗하였으나 여전히 1위 자리는 지키고 있다. 다만 9월 27일 기준 경쟁팀들보다 1경기를 더 치룬 상태에서 2위 그룹에 승점이 불과 1점 앞서 몹시 위태로운 1위이며 울산과 전북의 결과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 1~2위를 오가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와중에 FA컵은 16강부터 모두 원정경기였음에도 2년 연속 결승전에 올라갔다.

시즌 첫 타이틀이 걸린 10월 19일 FA컵 결승전에서 상대는 최강희감독이 돌아온 전북 현대 모터스. 원정이라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3천여명의 포항 원정팬의 응원 속에 포항 김승대의 선제골과 전북 김기희의 만회골로 전반을 1:1로 마쳤으나, 공격과 미드필더진에서 전북에 밀리기 시작하자 승부차기를 노리고 후반, 연장을 디펜스 모드로 잠구는 전략을 시전. 이런 와중에 연장 전반 이명주의 패널티킥 상황을 헐리우드 액션으로 판정한 심판에 항의하다 퇴장 당하는 악재를 맞기도 했으나 결국 경기 전 구상해 왔던데로 승부차기까지 경기를 끌고 가서 신화용의 선방쇼에 힘입어 승부차기 스코어 4:3으로 FA컵 2연패 및 FA컵 최다 우승(4회)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여담으로 이제는 우승에 대한 여유가 생기셨는지 2012 FA컵 우승처럼 펑펑 울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2013 K리그 클래식에서넌 결국 10월 5일 31라운드 경기에서 울산이 승점 3점을 추가하며 마침내 리그 1위를 빼앗겼고, 10월 A매치 데이 때문에 일정이 조정되면서 잠깐 1위를 탈환했으나 33라운드 이후 양팀 경기수가 같아진 시점에서 승점 5점 뒤진 2위를 기록한다. 황선홍 감독은 1위를 빼앗겼으나 오히려 추격하는 입장이 편하다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38라운드까지 변함없이 울산에 승점이 5점 뒤쳐진 상태로 추격하며 희망고문에 시달렸으나, 39라운드 오후 2시 포항 종합 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서울을 3:1로 격파하고 저녁에 열린 부산vs울산전에서 세제믿윤 덕분에 부산이 울산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기적처럼 승점을 2점차로 따라잡아 마지막 일발역전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12월 1일 40라운드 최종 경기에서 두 팀이 우승을 걸고 격돌했고, 이 날 황선홍 감독은 2011 플레이오프와 다르게 포항의 패스플레이에 대비한 울산을 상대로 한 가지 전술을 고집하지 않는 완숙함을 보여주며 시즌 내내 요긴하게 써먹던 제로톱을 버리고[42] 후반에는 오히려 울산과 같은 선 굵은 축구로 울산의 수비망을 두들기다 결국 추가시간에 터진 극적인 결승골로 영남 더비에서 승리하며 K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황선홍 감독은 첫 리그 우승이자 경이로운 용병 없이 K리그 최초 더블을 달성했다. 또한 부산시절 무관의 이미지를 완전이 벗어내고 3년동안 리그 우승, FA컵 2회 연속 우승을 이뤄내면서 스타선수는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K리그의 명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결승전 이후 12월 3일에 열린 2013 K리그 클래식 어워드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감독상을 수상하며 명실공히 K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3.3.4. 2014 시즌

외국인 용병 없이 2013 시즌 더블을 달성했으나, 구단과 프런트는 재정 때문에 오히려 우승 멤버인 황진성, 노병준, 박성호를 방출했다. 기대했던 외국인 용병은 커녕 외부 영입도 거의 없었고[43]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의 세 명만 내보내고신화용, 이명주를 비롯한 나머지 선수들과 군에서 제대한 김재성, 김형일[44]을 잡은 정도.

결국 황선홍 감독 본인도 달갑지 않게 여겼던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은 2014 시즌에도 유효하게 되었고, 포항은 쇄국축구 시즌2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K리그 클래식 개막전 울산 현대에게 0:1로 패배하고, 부산 원정에서는 1:3으로 역전패하는 등 시즌 초반 2연패를 당하면서 이번만큼은 황선홍 감독도 무리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ACL 산둥과의 홈경기에서는 1명이 퇴장 당한 상황에서도 0:2로 지던 경기를 기어코 2:2로 따라잡고 홈에서 수원을 상대로 2:1 역전승, 그리고 K리그 클래식 4라운드 전북 원정에서는 유스출신 신인 선수들로 구성된 1.5군으로 전북을 3:1로 털어버렸다! 그리고 2연패 후 5승1무를 달리면서 8라운드만에 다시 리그 1위에 복귀.

그리고 2013 시즌 유일하게 우승은 커녕 조별광탈의 쓴 맛을 봤던 AFC 챔피언스 리그도 무패 1위로 조별예선을 통과하여 16강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를 만나 1,2차전 합계 스코어 3:1, 깔끔하게 2연승으로 털어버리고 8강에 안착했다. FA컵도 16강에 올랐고 K리그 클래식도 2위 전북에 승점 4점차로 1위로 월드컵 휴식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서술했듯이 용병도 없고 전문 공격수도 없는데 제로톱과 상황에 맞춘 공격수 투입만으로 팀을 리그 1위에 모자라 득점 1위에 올려놨다. 이 팀 용병하고 공격수 없는 팀 맞나요 외부 상황을 탓하지 않고 기어이 기존의 전력에 새로 영입된 유스 출신의 신인 선수들을 조련하여 리그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에 국축 커뮤니티에서는 포항 팬만 빼고 "닥치고 국대 감독은 황선홍으로" 하는 의견과 함께 찬양중. 황 감독 국대가면 포항팬 다 죽는다 이 녀석들아 거기다, 홍명보호가 월드컵에서 보여준 단점들로 인해 이러한 의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아, 앙대![45]

6월 9일, 공식적으로 이명주의 알 아인 이적이 성사되었다. 구단 또한 홈페이지에 대체 가능한 선수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표능란세레소 오사카와 계약했을 때 연봉이 45억임을 감안하면, 50억 이적료라면 충분히 질 좋은 선수를 영입할 총알은 된다.[46].

그러나 이후 포항 구단은 투자에 인색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보강은 없었고, 팀은 후반기 들어 공격력의 부재/스쿼드의 한계/선수들의 헤이해진 정신력/체력 저하로 인해 전북에게 1위 자리를 내줬으며, 이어서 FA컵과 AFC 챔피언스 리그도 탈락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황선홍 감독을 비난하는 건 일부의 관심종자들 뿐, 팬들은 오히려 프런트를 질타하며 황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있다. 언론 역시 일제히 포항 프런트에 경각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 이상 황선홍 감독에게만 짐을 씌우는 것은 착취나 다름 없는 일이다
우승권 팀이 셀링 클럽의 행보를 이어간다는 것은 우승할 생각이 없거나 기적을 꿈꾸고 있거나

결국 포항은 이명주의 이적료로 부랴부랴 안드레 모리츠 등 외국인 선수 영입에 나서고 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외부 영입 없이 주전 선수들만 계속 돌려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체력 저하도 문제지만, 선수들 스스로 주전 경쟁의 경각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폼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황선홍 감독은 쓰리백도 써보고, 김태수를 공미로 올리는 등 갖은 방책을 써봤으나 김승대가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차출로 9월 한 달을 통으로 날렸고 강수일 하나 빼고 전멸해버린 공격진 때문에 결국 모두 실패하고 후반기에는 6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최악의 페이스 끝에 리그 3위까지 추락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일본 언론에서 세레소 오사카가 다음 시즌 황선홍 감독을 영입할 계획이 있다고 발표했다. 세레소 오사카는 디에고 포를란까지 영입하며 거하게 돈지랄을 했음에 불구하고 강등 위기에 몰렸는데, 황선홍이 과거 세레소에서 활약했던 인연도 있는데다 외국인 감독이라지만 같은 아시아권 문화라 선수단과 엇박자를 낼 여지도 적고, 리그에서 더블을 기록하며 감독으로서 능력을 입증한 터라 매력적인 카드이긴 했다. 물론 자칫 2부리그로 떨어질 팀에 선뜻 가겠다고 나서는 감독은 많지 않겠지만, 그동안 워낙 포항 프런트가 짜게 놀아서 '포를란 정도는 사줄 수 있다'는 지름신의 유혹을 견딜 수 있을지 포항 팬들은 은근히 걱정하고 있는 중.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세레소아시아판 QPR는 대신 파울루 아우투오리 감독과 계약하기로 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강등당하고 새 감독은 2부리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를란은 세레소 팬들에게 혐짤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어수선함 속에 끝내 포항의 경기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스플릿 라운드에서 조차 3무2패라는 저조한 성적 끝에 3위 자리 마저 지키지 못하고 4위로 시즌을 마침으로서 2015년 ACL 출전권까지 잃어버렸다. 프런트를 죽입시다. 프런트는 우리의 원수

일단 포항과 황선홍 감독 계약은 2015년까지 되어 있는지라 본인은 2015년도 포항에 남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구단에서도 황 감독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부임 5년차에 이적시장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3.3.5. 2015 시즌


시즌 초반 4경기만 치렀지만, 6위에 간당간당 매달리고 있는 상태. 라인 브레이커 김승대가 초반에 부상으로 경기에 띠엄띠엄 출전한 데다, 야심차게 영입한 용병 공격수들이 아직 기대만큼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데다[47], 여기에 주전 수비수들의 부상으로 고전하고 있다. 덕분에 신화용이 늙어간다

4. 지식채널e '어떤 스트라이커의 1승' 편

"나는 '한 골'이 절실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전 다시 한국에 가야합니다.
난...한국 가야 돼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을 다 바꾸고 은퇴하려고요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 1999년 스포츠 전문 웹진 "후추닷컴" 일본 오사카 인터뷰 -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착이 있지만
황선홍에게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는 팀의 베스트로서 항상 혼자 아픔을
뒤집어썼다.

프랑스에 5대 0으로 대패 하던 날 그는
내 숙소에 찾아와 밤을 새워 울었다.

조금 더 일찍 좋은 팀에서 체력과
개인 스피드를 연습했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골 하나가 너무나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여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 전 국가대표 황선홍 -

5. 기타

아내인 정지원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이중 맏이이자 장녀인 황현진 양이 '이겨'라는 이름으로 걸그룹 예아(Ye-A)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거세게 반대를 했는데 본인이 대중들에게 안좋게 노출되었던지라(위 문단 참조) 그런 상황에서 비난이나 악플을 견딜수 있을까 해서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하지만 황현진 양이 "이 일을 해보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후회할 것 같다"고 말했고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48] 한편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 합격하여 1학기를 재학한 후 활동을 이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로는 탈퇴했다는 설이 돌고 있다.
둘째이자 장남인 황재훈 군은 아버지를 따라 축구선수가 되었고 선수생활을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입고 황선홍 본인이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 본인이 당해봤던 부상이라 재활과정 등을 잘 아는지라 그만두게 했다고.

그 외 가족으로는 형이 한 명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이 황선수이다.황선수의 형 황선수 황선수의 아우 황선수 사업을 하고 있고 민간봉사단체를 운영하기도 해서 다음 인물검색에도 등재되어 있는 분.

오래 전부터 국제무대에서 대표팀 소속으로 경기를 해온 선수인지라 가끔은 황선홍이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황선홍은 국대팀 주장을 맡은 적은 없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홍명보와 황선홍을 헷갈리기도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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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큰딸 현진은 2014년 아이돌그룹 예아에 데뷔했다
  • [2] 포스트 플레이도, 처진 스트라이커 위치에서도, 윙 쪽으로 빠져서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플레이를 언제나 해 주었다. 그러나 후에 황선홍은 '한 가지만 잘 하려 했으면 그 쪽으로 특화되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 [3] 일본과의 A매치 총 4경기에 출전해서 넣은 골이며 (도움도 몇 개 있다) 심지어 4경기 모두 승부를 결정지은 결승골을 넣었다. 당연히 한국은 황선홍이 출전한 일본 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미우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패배했던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일본 전에서도 황선홍은 경고누적으로 결장했다.
  • [4] 다만 국대차출이 잦았던 이유도 있으나, 신태용이나 리그를 씹어먹은 다른 레전드들과 비교하면 선수시절 커리어는 포항이나 K리그의 레전드라 칭하기에는 많이 모자라다. 30주년 베스트11 선정때 골수팬들에게 홍명보와 함께 이름값으로 들어갔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 [5] 성이 황씨라서 황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를 체워 뒤뚱거리던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황새라고 별명을 붙인 슬픈 사연이 있다.
  • [6] 다만 이건 그럴 만도 할 것이 골 결정력이 사기급(...)이었던 차범근과는 다르게 황선홍은 결정력이 다소 떨어졌지만 슛을 많이 날려 그것을 커버했다. 사람들이 황선홍이 골을 많이 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골찬스를 많이 날려먹어서 그렇다.
  • [7] 김도훈이 타이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여담으로 이 때 황선홍은 연속골에 실패한 9번째 경기까지 계속해서 같은 축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징크스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축구화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
  • [8] 같은 해에 FA컵 우승까지 이루면서 K리그 최초의 더블우승(리그 우승 +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외국인 용병 하나 없이 국내 선수만으로 이룩한 업적
  • [9] 당시 황선홍은 청소년 대표팀 경력도 한번 없던 그야말로 무명 대학선수에 불과했다.
  • [10]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름만 바뀌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웬 명지대의 듣보잡 선수를 뽑았다가 허정무 감독은 욕을 먹게 되는데...
  • [11] 전반기 1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서 후반기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지만 경기에는 내보내주지 않았다고
  • [12] 첫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6개월을 재활로 보낸 뒤 복귀하였는데 다시 두경기만에 무릎 연골 파열로 2차 수술행. 황선홍은 이때 지금의 부인인, 당시 독일로 어학연수를 와있던 정지원씨를 만나게 된다. 아는 후배들을 따라 대학 축제에 놀러갔던 그는 지금의 와이프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고, 후배를 보채서 소개팅까지 성공. 첫 만남 후 무릎 부상을 당해버려 거동이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정지원씨는 어학연수 일정이 끝났음에도 6개월간 귀국을 늦춰가며 병수발을 했다. 귀국 후 그 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린다.
  • [13] 이 때는 사실상의 전신인 완산 푸마. 이듬해 전북 버팔로로 구단명이 변경되었고 자금난으로 해체된 후 현대자동차의 스폰서로 현재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재창단된다. 그러나 전북 버팔로와는 엄연히 별개의 팀으로 되어 있다.
  • [14] 단, 이흥실은 전북에서 1경기도 뛰지 않고 바로 은퇴했다.
  • [15]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2014년의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세레소와 경기를 치루자 적장임에도 엄청난 콜을 받을정도로 사랑받았다.
  • [16] 그 경기때 황선홍은 어깨 탈골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부상정도를 자세히 모르는 데니스가 황선홍을 건드리고 말았고, 황선홍은 데니스의 멱살을 잡았다. 데니스로서는 걱정해서 그랬다가 드잡이를 잡힌 나머지 빡쳐서 성질을 냈고 그 결과 황선홍의 임대가 결정되었다. 수원 입장에선 팀에 온지 얼마 안 되는 황선홍 보다 데니스가 전력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겼다.
  • [17] 이 트레이드가 이후 개그적인 상황을 야기했다. 이 트레이드 전에 수원은 당시 유고 특급 용병 샤샤를 가시와로 먼저 보냈다. 샤샤와 절친이었던 박건하는 매우 아쉬워 했는데, 얼마 후 박건하도 가시와로 임대갔다.(...) 그러다 일본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샤샤가 황선홍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을 나누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하도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둘 다 상당히 멋쩍은 반응이었다고. 박건하는 샤샤보고 '이제 너 얼굴 보는 것도 질림ㅋ'라는 반응을 보였다.
  • [18] 비슷한 케이스가 홍명보. 황선홍처럼 부상이나 여론의 비난으로 부침이 있진 않았지만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가 빈약한 편이고 J리그 활약상이 더 돋보인다는 점은 황선홍과 같다. 게다가 K리그 입단과정에서 파문을 일으키고(이거야 포항구단도 한통속이었다지만) 선수생활 말년에 LA갤럭시 이적을 통해 포항을 엿먹이며 K리그를 완전히 물로 보는 행동을 했기에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빼더라도 황선홍보다 평가가 훨씬 않좋다. 그래서 이쪽도 국대팬, 라이트팬이 아니면 한국축구 레전드 대우는 해줘도 K리그 레전드로 꼽지는 않는다.
  • [19] 승=3점. 무=1점.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우리의 월드컵 본선 전략이었다. 최대한 비기기.
  • [20] 여담으로 볼리비아전 당시 주심이 무슨 생각인지 후반전에 무려 13분의 추가시간을 주었고, 이 추가시간 동안에도 황선홍은 여러 차례 기회를 놓친다. 이 경기의 여파로 FIFA에서 추가시간에 관한 규정을 만들면서 현재와 같이 주심의 재량권을 제한하고 대회 주최 측에서 추가시간을 공지하는 방식이 도입된다.
  • [21] 리그, 국가대표, 상기한 올림픽대표 와일드카드까지 96년 한해에만 60여경기를 뛰며 무릎을 혹사한 탓. 92년 십자인대와 연골이 파열되었던 바로 그 오른쪽 무릎이었다. 그리고 이후 굉장히 아끼는 후배는 몇년 뒤 그보다 더 심한 혹사를 당하게 된다
  • [22] 잠실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최종예선 2차전에서의 0:2패배, 그리고 98년 초에 벌어진 다이너스티컵에서의 패배.
  • [23] 1998년 축구협회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야간 경기를 잡았다. 실전 대비라고 설명하기 힘든, 약체 중국과 경기를 잡은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축구협회의 병크는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헌데 브라질 월드컵을 겪으면서 또다른 정점을 찍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대한축구협회 항목 참조.
  • [24] 이 경기를 계기로 한국 축구팬은 한중전만 열리면 부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 [25] 축구선수로, 그것도 공격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35살의 나이였던지라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체력은 부족했고, 대회 내내 안정환과 번갈아가며 원톱 역할을 맡았다.
  • [26] 그의 경험과 센스를 확실히 보여주었던 장면. 이을용의 크로스를 왼발로 툭 갖다대서 방향만 바꿔놓는 것으로 골을 넣었는데, 웬만큼 슛 기술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못 할 슛이다.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황선홍은 이을용이 애매하게 줬었다고 그 상황에서 살짝 불만을 드러냈었다.
  • [27] 히딩크는 황선홍이 자기에게 달려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박항서에게 안기는 걸 보고(...) 약간 서운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안습. 대신 박지성이 안겨줬잖아요
  • [28] 머리에 씌우는 걸로 빠르게 응급처치가 가능한 그물붕대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당시 치료를 맡았던 최주영 의무팀장이 붕대를 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일부러 붕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데 붕대를 감는 사이, 10명으로 뛰던 우리 대표팀은 골을 먹어버렸다(…). 그 와중에 방송중에 관중석에 있던 황선홍의 딸 황현진 양(당시 9살)이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 [29] 다만 2012년 최주영 의무팀장의 인터뷰에선 그물붕대가 있었음에도, 당황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탄력붕대를 꺼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 [30] 흔히 차범근이 센터 포워드가 아니라는 소리가 있는데 그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차범근은 국내 대표팀에서는 윙 포워드였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뛰었다. 다만 독일에서 마지막 2년은 미드필더로 뛰었다. 본인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얘기이다.
  • [31] 일단 외부에 공표한 모양새는 기술위원회는 황선홍을 내정했으나 아드보카트가 홍명보를 지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뷔 이후부터 두 사람의 행적을 지켜본 중장년층 팬들 사이에선 홍명보가 스틸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진실은 저너머에.
  • [32] 그나마 황선홍 감독이 오고나서 구단홍보는 많이 나아졌으나 그 나머지는...
  • [33] 윙백인 김정겸으로 승부조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았으나, 미리 정보를 캐치하여 토토질을 했다가 걸려서 3년간 자격정지(...)
  • [34] 그리고 지쿠는 강원에서 김학범 감독의 조련하에 몸무게도 줄이고 포텐도 터뜨려 강원 FC의 강등 탈출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K리그에 적응하고 선수 스텟이 좋아도 포항의 패스워크 축구에는 맞출 수 없었고 결국 2012 시즌 이후에는 자유계약 신분으로 계약해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딱 맞다.
  • [35] 지쿠의 실패는 이후 나비효과처럼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데 지쿠에 투자한 돈이 너무 많아(정확한 액수는 공개된 적이 없지만 현재까지 알음알음 알려진 바로는 이적료+연봉을 합쳐서 최소 30억 이상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돈 많이 쓰는 수원이라도 휘청거릴 금액이다.) 구단 빚이 증가했기 때문. 그래서 2013 시즌부터는 외국인 선수를 데려올 수 없을 정도로 재정난에 빠지게 된다.
  • [36] 경남은 FA컵 결승의 복수를 부르짖었으나 이어진 리그경기에서 포항에게 4:0으로 관광당했고, 울산, 전북 모두 포항에게 얻어맞고 각각 ACL 진출, 우승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 [37] 실제로 구단 운영진에서도 경질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구단 직원들이 '황감독님 해임되실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정도.
  • [38] 2013 시즌 포항을 비롯해 대부분의 K리그 팀들은 4-3-2-1이든 다른 포메이션이든 주로 원톱을 가동하는데 이 경우 그 날 원톱 공격수의 컨디션과 상대 수비에 따라 원톱이 쌈싸먹히면 경기가 전혀 안 풀리는 단점이 있다. 일단 K리그 공격수 중에 메시같은 선수는 없으니. 하지만 포항은 전반에 원톱을 써보고 안 되면 후반에 제로톱 or 아에 경기전에는 원톱으로 페이크 놓고 제로톱으로 흔드는 전술로 부족한 스쿼드와 무게감이 떨어지는 공격진으로 2013 시즌 어떻게든 승점 3점을 챙기는 경기를 이어나간다. 이후 비슷한 고민에 처하게 된 다른 K리그 팀들(제주, 수원, 대구) 또한 2013 시즌 중반부터 포항과 비슷한 제로톱을 시도하게 된다.
  • [39] 세계 철강 경기 불황 + 낙하산 사장의 삽질(...). 그래서 포항사람들은 낙하산 사장을 보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전 대통령 형님을 죽도록 까고 있다고 카더라...
  • [40] 동까들이 욕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동국+김은중 투톱은 대한민국 국대에서 상상의 조합이다. 주 모 야구팀관점에서 보면 LCK포와 같은 조합
  • [41] 사실 저 황선대원군과 쇄국축구도 팬들이 아닌 프론트에서 SNS로 먼저 붙인 별명이다. 그리고 그걸 자랑으로 여기는 포항의 무능 프론트
  • [42] 이미 포항의 전매특허인 제로톱은 울산에서도 충분히 대비가 되어있었기에 전반 내내 포항은 골목골목 패스를 끊어먹는 울산의 수비에 고전했다.
  • [43] 입단 테스트 영입된 선수 한 명, 임대로 영입한 강수일 총 2명
  • [44] 근데 김형일도 시즌 시작전에는 중국 리그로 이적할 뻔 했다. 하지만 협상이 무산되면서 팀에 남게 된 것
  • [45] 그러나 최강희 감독이 클럽 잘 이끌다가 국대 감독 맡으면서 험한 꼴 당했던 만큼 지금 황선홍 감독이 국대 감독이 되는 건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홍명보의 사퇴 후 축협에서 황선홍 감독에게 국대 감독 제의를 했으나축협 색기들아 작작 좀 해라 레전드들 다 죽는다 거절했다고 한다.절대 욕먹을 것 같지 않던 지 친구 그리 되는걸 보면 인간적으로 나라도 안 할것 같다. 다신 욕먹기 싫어
  • [46] 당초 군대 때문에 돌아와야하는 신형민이 그 영입 대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신형민은 전북에 가버렸다(...). 이렇게 되면 해당 자금은 구단이 유소년에 투자하거나 연봉 및 수당이나 부채를 갚는데 쓸 것으로 보인다.
  • [47] 라자르의 경우는 원톱용으로 영입했는데, 정작 이놈은 윙어처럼 플레이한다.(...) 몸빵이 차두리틱하기 때문에 잘만 이용하면 리그 중후반부터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을 듯. 다만 골 결정력이...
  • [48] 덧붙여 황선홍은 딸의 활동에 일체 비호및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만약 포항 프런트가 포항 홈경기에 자신의 딸이 소속된 걸그룹을 초청한다 해도 본인이 불허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